
‘메타버스’? ‘버추얼 휴먼’? 딱딱한 용어로는 잘 와닿지 않는다. 현시대의 주요 키워드가 되기까지, 메타버스와 버추얼 휴먼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1992 | ‘메타버스’ 용어가 탄생하다!
메타버스라는 용어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탄생한 지 끽해야 10년쯤 됐으려나 싶은 이 말은 놀랍게도 무려 30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다. 1992년 발간된 미국 소설가 닐 스티븐슨의 SF 소설 시리즈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
책의 배경은 경제 붕괴가 일어난 21세기 로스 엔젤러스. 주인공인 히로 프로타고니스트는 엉클 엔조라는 마피아의 피자회사에서 일하는 피자 배달부다. 그러나 한편 프리랜서 해커이기도 한 그는 3차원 가상현실 ‘메타버스’ 안에서는 최고의 전사다. 가상의 아바타뿐 아니라 현실의 인체에까지 해를 입히는 ‘스노 크래시’라는 위험한 마약이 메타버스에서 유통되자 이를 막기 위해 싸워 나가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다.
소설 속에서 메타버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컴퓨터는 그런 식으로 내부에서 만든 다양한 색의 가느다란 광선들을 어안 렌즈를 통해 어떤 각도로든 쏘아 낼 수 있다. 컴퓨터 내부에 장착된 전자 거울을 사용하면 그런 광선으로 히로가 쓴 고글 렌즈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 (…) 양쪽 눈에 보이는 모습에 약간의 차이를 두면 그림은 입체적으로 보인다. 1초에 그림을 72번씩 바꿔 주면 그림은 실제로 움직이는 효과를 낸다. (…) 그리고 작은 이어폰을 통해 스테레오 디지털 사운드를 들려주면 움직이는 입체 화면은 완벽히 실제와 같은 배경음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히로는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는 셈이다. 그는 고글과 이어폰을 통해 컴퓨터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이런 가상의 장소를 전문 용어로 ‘메타버스’라 부른다. ” _《스노 크래시1》
지금이야 우리는 게임 속 세계 등 가상현실이 익숙하지만 1992년에 이런 상상력이라니, 놀랍다. ‘아바타’라는 개념 역시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보는 사람들은 물론 실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 광섬유를 통해 내려온 정보에 따라 컴퓨터가 그려 낸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하다.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바타’라고 하는 소프트웨어들이다. 아바타는 메타버스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자 사용하는 소리를 내는 가짜 몸뚱이다. (…) 아바타는 장비가 허락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다. 못생긴 사람도 아바타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_《스노 크래시1》
《스노 크래시》는 메타버스 시대를 이끌어낸 소설이라고 평가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비대면 만남이 대면 만남보다 익숙해지고,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급부상하며 2021년에는 SBS D포럼에서 닐 스티븐슨을 초청해 대담을 열었다. 관심이 생겼다면 시청을 권한다.
1998 | 국내 최초 사이버 가수 아담 두두등장
1992년 닐 스티븐슨의 메타버스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였다. 그러다가 1998년, 국내에서 최초의 버추얼 휴먼이 세상에 등장했다. 말 그대로 고유의 인격을 가진 가상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버추얼 아이돌 이세계아이돌, 플레이브의 대선배격인 사이버 가수 ‘아담’이다.
아담은 1998년 1월 23일 “세상엔 없는 사랑”이라는 곡으로 데뷔했다. 생년월일은 1977년 12월 12일이니, 20세의 나이로 데뷔한 셈이다. 준수한 외모의 3D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아담에게는 여러 가지 설정이 세세하게 부여되었다. 신장 178cm, 체중은 68kg, 혈액형은 O형. 심지어는 시력까지 설정되어 있었다. 왼쪽 눈은 -0.4에 오른쪽은 -0.5라는 설정이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아 평상시에는 콘택트 렌즈를 착용한다고.
이 묘하게 현실적인 프로필 중에서 유달리 비현실적인 설정이 있는데, 바로 출생지다. 아담의 출생지는 에덴. 구약성경의 초반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어쩌면 최초의 사이버 가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 속에서 여호와가 창조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이름을 따왔는지도 모른다.
1990년대 당시 몹시 도전적인 시도였음에도 아담은 가수로서 꽤나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1집 앨범이 20만 장 이상 판매되는가 하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응원가를 발매하고 음료수 광고까지 찍었다.
이렇게만 보면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1집 이후 아담은 소리없이 사라지게 된다. 아담 이후 여러 사이버 연예인이 등장하며 경쟁력이 떨어지기도 했고, 아담을 활동시키는 데에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 기술적인 한계 탓에 입 모양을 몇 분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억 단위의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다소 씁쓸한 퇴장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속 1호 사이버 가수는 아담이니, 한 시대에 획을 그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003 | 세컨드 라이프, 메타버스를 현실화하다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9년 뒤, 사람들은 이러한 메타버스 세계를 체험해 볼 수 있게 된다. 린든랩이 개발한 인터넷 기반 가상현실 플랫폼 ‘세컨드 라이프’를 통해서다. 린든랩의 창업자인 필립로즈데일은 실제로 닐 스티븐슨의 《스노 크래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2024년 현재 GenZ(젠지) 세대가 즐겨 사용하는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 라이프에서, 유저들은 《스노 크래시》에서 묘사되듯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아바타를 마음대로 창조해 소통할 수 있다. 인간 형태뿐 아니라 수인, 동물, 심지어는 치킨 등의 형태로도 아바타 제작이 가능하다.
현실세계와 유사한 세계뿐만 아니라 유저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각종 세계 명소나, 영화 <스타워즈>의 행성을 탐험할 수도 있고, 디자인 프로그램을 이용해 옷이나 가구 등 자기만의 작품을 제작할 수도 있다. 세컨드 라이프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2010년대에 사람들이 주목한 부분은 바로 ‘경제성’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직접 제작한 오브젝트를 판매하거나 부동산 거래를 하는 등 게임 내에서 경제활동이 가능했는데, 이 게임머니는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어 세컨드 라이프를 이용해 큰 돈을 번 사례도 많았다.
세컨드 라이프는 2007년 말 기준 사용자수가 1200만 명에 달하는 등 크게 성공했지만, 이후 모바일 디바이스가 등장하면서 모바일 생태계에 알맞은 기술을 구현하지 못해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에 밀려 점점 쇠퇴했다.
2006·2011·2018 | 차세대 세컨드 라이프, 절찬리 운영 중
비록 세컨드 라이프는 우리 곁에서 멀어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줄 게임·플랫폼이 성황리에 서비스되고 있다.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 그리고 제페토 이야기다.
로블록스는 2006년에 만들어진 샌드박스·오픈월드 게임으로, 세컨드 라이프처럼 자기만의 아바타를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제작할 수 있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플랫폼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로블록스의 핵심 요소는 일명 ‘게임 속 게임’. 유저들이 로블록스를 이용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내놓으면, 다른 유저들이 그 게임을 즐긴다. 1인칭 슈팅 게임(FPS)부터 타이쿤, 시뮬레이터, 스토리게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지각색 수많은 게임이 창작되어 있다. 물론 유저 간 소통 기능도 빠지지 않는다. 로블록스는 ‘게임을 창작하는 게임’이라는 독특한 컨셉을 잃지 않고 유저들을 끌어모아 2024년 현재도 계속해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2024년 1분기 성적을 보면, 일간 활성 사용자 수(DAU)가 전년 대비 17% 증가한 7700여 명을 기록했고, 매출 또한 22% 증가해 8억 1000 달러를 기록했다.
2011년 정식 출시된 마인크래프트도 로블록스와 마찬가지로 샌드박스 게임인데 조금 다르다. 마인크래프트는 기본적으로 생존 게임으로, 게임에 공식적인 스토리가 존재한다. 자원을 캐서 집을 짓고, 동물을 사냥해 음식을 먹고, 괴물들과 싸우고, 그렇게 최종보스까지 마무리하면 진엔딩을 볼 수 있다. 다만 꼭 스토리를 깨야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자유도가 몹시 높아 로블록스처럼 마인크래프트를 이용해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만들어 유저끼리 즐기기도 한다. 마인크래프트는 2023년 2월 기준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가 1억 2천만 명에 달하며 10년이 지난 지금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제페토는 2018년 국내에서 출시된 증강현실(AR) 아바타 서비스다. 제페토는 앞선 게임들보다는 비교적 더 플랫폼적인 성격을 띈다. 인공지능 기반 얼굴인식 기술로 자신과 유사한 아바타를 만들 수도 있고, 나와는 다른 ‘이상적인 나’를 만들 수도 있다. 현실감이 높은 그래픽으로, 현실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제페토에 옮겨 만드는 경우도 많다. 구찌와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가 제페토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기도 하고,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대면 졸업식이 어려웠을 당시 제페토에서 졸업식을 하기도 했다고. 제페토는 국내에서 출시한 플랫폼이지만 해외 이용자 비중이 높은 편이다. 2022년8월 MAU가 20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매년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E’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88호(2024.07)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