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비문학] 평화는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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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에 이 책을 들었을 때 마음이 따스해져 왔던 건 소책자처럼 아담한 사이즈, 밝은 에메랄드색 표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책 표지의 보들보들한 재질이 마치 고양이 털처럼 손에 착 감겨옴과 더불어 《평화는 처음이라》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는 이 책을 평화운동으로의 초대장이라 말한다. 평화라

갈등이 없는 상태, 모든 것이 편안하고 차분한 상태를 평화라 하지 않나? 반전(反戰)운동이 곧 평화운동 아닌가? 

이 정도면 평화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저자는 ‘평화는 처음(일 것)이라’ 말하는 걸까?

 

평화, 난 널 잘 몰랐구나

책을 펼치니 저자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평화의 개념에 대해 차근히 짚어가는데, 그 결론이 무척이나 놀랍다. 

평화란 아름다운 말이고,  반대하는 이도 없어 보이니 보편적인 가치일 것 같지만, 사실은 몹시 당파적, 논쟁적 개념이란 것. 

책은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의 본문 일부를 소개한다.

(중략)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 ‘평(平)’ 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이다.

저자는 일반화의 폭력의 사례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기를 든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가 가장 강했던 시기인데, 번역하면 ‘로마의 평화’쯤 된다. 

 


 

그런데 로마에 정복당한 사람, 로마의 노예들에게도 ‘팍스 로마나’였을까? 

뼈를 때리는 질문이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인들이 이들에게 가한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렇다면 평화를 ‘갈등이나 혼란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어떤 의도로 말하느냐에 따라 평화의 사회적인 의미와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 

게다가 그에 따라 ‘우린 좋은 사람, 저쪽은 나쁜 사람’이라는 갈라치기가 일어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아군과 적군, 전쟁과 평

명쾌하지만, 생각해보니 양쪽에서 모두 ‘자기 진영의 이익’에 따라 똑같이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이런, 평화라는 개념을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네가 생각하는 그것만 평화가 아니야!

심지어 평화는 ‘전쟁’에 반대되는 개념만이 아니다.

저자는 평화에 대한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개념에 기대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나눠 설명한다. 

폭력의 대척점, 즉 폭력을 극복한 자리에 놓이는 게 평화인데, 폭력은 다시 직접적 폭력과 간접적(구조적) 폭력으로 나눌 수 있다. 

직접적 폭력은 전쟁, 테러, 학살, 고문처럼 물리력이 동반된 폭력이고, 

간접적 폭력은 물리력이 사용되진 않지만 구조적 권력에 의한 폭력을 말한다. 

가령 빈곤, 차별, 혐오 등은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구조적 폭력이다. 

이와 연결해 평화의 개념을 확장하면, ‘전쟁이나 군사 분쟁 같은 물리적 폭력이 부재한 상태’는 소극적 평화다. 

싸워야 하는 대상이 명확해 보다 쉽게 상상할 수 있어 ‘소극적’ 평화라고 이름 붙인 걸까. 

그리고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찾아내야 하는 사회 구조적인 폭력이 부재한 상태가 바로 ‘적극적 평화’라고 말한다. 




▶평화의 개념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얼까?  

※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60(2022.03)에 실린 글입니다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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