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비문학]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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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낭비거나 짐이기만 할까?

최근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주제 중 하나가 ‘돌봄’이다.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를 훑다보면 부쩍 돌봄에 대한 기사나 보도가 늘어났음을 느낀다. 물론 많이 다뤄진다 해서 돌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늘어만 가는 노인 인구, 출산율 0.6명 시대에도 좀체 찾기 어려운 어린이집,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굴레와도 같은 간병 등, 돌봄은 최근 한국 사회가 마주한 ‘위기’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돌봄이 머지않아 도래할 국가적 재난이나 비상사태처럼 묘사되는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든다.

어째서 우리는 돌봄을 위기나 재난처럼 생각하게 된 걸까? 언론이 돌봄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자. 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여러 언론은 돌봄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 혹은 돌봄을 떠맡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고통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돌봄이란 무언가를 생산하기는커녕 돈만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낭비’거나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짐’이다. 돌봄이란 우리가 정상이라 규정한 삶 ‘바깥’에 위치한 활동인 셈이다.

하지만 돌봄은 그저 낭비거나 짐이기만 할까? 어쩌면 잘못은 돌봄이 아니라, 우리가 돌봄을 생각하는 방식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기현과 홍종원의 대담집인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는 돌봄이 개인의 불행이나 국가가 떠맡아야 할 부담이 아니라 말한다. 돌봄이란 곧 우리가 맺는 관계 그 자체다. 이렇게 돌봄이 삶의 바깥에 놓인 무언가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된다면, 달라지는 것은 돌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다. 돌봄이 삶의 중심에 놓인 만큼, 우리가 삶을 생각하는 방식도 크게 바뀔 수 있다. 


돌봄, 다름을 헤아리며 배려하는 관계

인간은 관계적 동물이다. 하다못해 얼굴을 직접 맞대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두 지은이는 인간이 맺는 관계야말로 곧 돌봄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관계를 맺는 우리가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의 한 반이라는 아주 작은 공동체에서도 누군가는 공부를 잘 하고, 누군가는 운동신경이 좋으며, 누군가는 말주변이 탁월하고, 누군가는 배려심이 깊을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각자의 다름을 이해하며 다름에서 나오는 부족함을 채워줘야 한다.

두 지은이는 이처럼 사람들이 함께 살며 맺을 수밖에 없는, 다름을 헤아리며 배려하는 관계를 돌봄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물론 두 지은이 역시 돌봄이란 말을 지나치게 확장했을 경우 그 의미가 옅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과감하게 관계가 곧 돌봄이라 말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돌봄을 삶 바깥에 두어왔기 때문이다. 돌봄은 나의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는, 혹은 내 삶을 희생해서 해야 하는 무언가로 여겨질 뿐 그 가치는 무척 낮게 매겨졌다. 하지만 돌봄이 관계가 될 때, 돌봄은 더 이상 삶 바깥의 무언가가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고 또 받기도 하는 삶 자체가 된다. 

돌봄은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런 만큼 내가 내 마음을 잘 헤아리며 스스로를 돌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두 지은이는 말한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돌봄의 관점에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길고양이를 학대하거나 비둘기를 혐오하는 것을 넘어 수백 년간 이어진 자연에 대한 착취,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기후위기 등은 인간이 자연과 잘 돌보는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87호(2024.06)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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