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키워드리포트] 6월항쟁, 출발선은 ‘서울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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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은 독재주의와 한쌍인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에는 20년에서 40년 이상 권력을 쥔 통치자가 많은데 대부분 부패한 독재 정권이다. 쿠바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라 좀 다를 수 있는데, 카스트로의 경우 49년 집권했고, 북한의 김정일은 17년을 집권했다. 현재 제일 주목받는 장기집권자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으로, 2024년 선거에서 이겨 ‘30년 집권’이 확정됐다. 박정희는 18년을 집권했다.    

경제적 성과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정권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집권 기간 동안 반공주의를 앞세워 권력에 위협적인 인물이나 단체를 반국가행위자로 몰아 제거했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세력에 대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고문하고 투옥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을 발판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이 매우 커 사회적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당 지도자들이 급부상해 권력 유지가 쉽지 않은 상황에 봉착했다. 

1971년 4월 치러진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온갖 관권과 금권을 총동원했지만 판세를 쥐기가 어려웠고, 선거 막판에는 마지막 선거라며 국민에게 읍소했다.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어렵게 정권을 손에 넣긴 했지만, 정권 유지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10월 유신’은 유신체제 혹은 유신헌법에 기반한 제4공화국의 별칭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을 전면 중지시켰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정치활동 목적의 모든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 사전 검열, 대학 휴교, 위반자는 영장없이 수색·구속…” 초헌법적 유신체제가 시작됐다. 

유신체제 아래서 헌법 개정안이 나왔고, 그해 12월 27일 국민투표라는 겉치레를 거쳐 유신헌법을 확정한다. 이 헌법은 현대 민주정치의 기본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했다. 법률 유보 조항을 두어 기본권 제한을 쉽게 할 수 있었고,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림과 동시에 중임, 연임 규정을 없애 무기한 집권이 가능하게 했다. 국회 회기를 단축하고 권한을 약화시켰으며,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했다.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삼권분립이라는 현대 민주정치의 기초도 모조리 무시했다. 박정희의 영구적인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다.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제4공화국이 출범했고, 대통령을 새로 선출해야 했다. 72년 8대 대통령 선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다.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선출했다. 박정희 단독후보였고, 99.9% 대의원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민주화세력, 노동조합, 종교단체, 대학가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지만, 긴급조치라는 무서운 탄압에 밀려 실패와 좌절을 거듭했다. 민주주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한, 폭압적·권위적·전체주의적인 일인독재 체제였던 유신체제는 1979년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박정희가 암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서울의 봄’

유신체제를 말할 때 ‘서슬퍼런’ 이란 수식을 쓰곤 한다. 특히 긴급조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휘두르는 무서운 칼이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정부를 비판할 수 없도록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식당, 버스, 택시, 주점 같은 사적인 공간에서 한 말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한마디로 공포정치였다. 

박정희가 죽자 국민들은 서슬퍼런 유신체제가 종식되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치가 시작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추종자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의 실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정권을 압박하며 정권장악에 나서자 숨죽여 있던 분노가 터져나왔다.   

당시의 가장 상징적인 항쟁이 서울역 집회다. 1980년 5월 15일, 1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했다. “전두환 퇴진하라”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광장에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동안 대학가에서는 학교 내에서조차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어떠한 정치 시위도 불가능했다. 


“70년대 말에 일명 ‘하사건’이라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보통 시위를 하면 서너 명이 주동팀으로 꾸려지는데 도서관에서건, 단과대 앞마당에서건 시위를 알리는 첫마디가 ‘학우여!’였어요. 근데 ‘학’자의 기역 받침도 채 발음하기도 전에 감시하고 있던 사복 경찰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연행해 갔다고 해서 ‘하사건’이라고 했어요. 그게 긴급조치 시대의 대학 모습이었어요.” _<서울역의 함성과 통한 80년 5월 서울역 광장 시위> 


이날의 서울역 시위는 대학생이 주축이 된 자연발생적, 자발적 시위였다. 시민들은 시위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서울역 광장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길고 긴 고통의 ‘겨울공화국’을 보내고 맞이한  ‘서울의 봄’이었다. 국민들은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와 재야 지도자들도 봄을 맞이할 준비로 바빴다. 

하지만 그날의 서울역 집회는 한계 또한 뚜렷했다.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있었지만, 이들이 십만 명이 넘는 시위대를 이끌 역량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청와대로 가자, 여의도로 가자 의견이 많았지만, 유혈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준비가 부족하니 각 대학으로 돌아가 사회 민주주의 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일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신군부 세력은 이를 빌미로 사회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기다렸다는 듯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내린다. 모든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했고, 국회를 폐쇄했고,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또한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교수 학생 등 체제에 반대하는 인물들 2699명을 체포했다.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전두환이 벌인 ‘5·17 쿠데타’였다. 

다음날인 5월 18일, 신군부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켰다고 허위 사실을 날조하며 시위대를 포함한 광주의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살인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광주의 시민 수백 명(공식적인 집계와 달리 암매장 및 미신고자를 고려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됐고, 민주주의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리는, 광주항쟁은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들에게 큰 좌절감과 패배의식을 안겨주었으며, 일종의 죄의식을 갖게 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정권의 숨막히는 폭정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으며, 다시 시작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이 오랜 움직임이 1987년 6월항쟁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서울의 봄’을 1987년 6월항쟁의 출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E’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87호(2024.06)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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