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특집 맛보기] 우리나라 민주주의, 어떻게 발전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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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17일 | 건국헌법 제정 

1945년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 1948년에 와서야 남한만의 건국헌법이 제정됐다. 조선시대에서 일제 치하로 이어짐에 따라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의식이 미국과 유럽에 비해 낮은 편이라 입헌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오래 걸렸다. 건국헌법 제정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 1952년 | 입헌주의 유린한 ‘발췌개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승리가 불확실해지자 1951년 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가 이를 부결하자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고, 이를 강행하기 위해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52년 7월 4일,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군인과 경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이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였다.(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 이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가 치러졌고, 이승만이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발췌개헌은 ①일사부재리(一事不再議)의 원칙에 위배되고, ② 공고되지 않은 개헌안이 의결되었고, ③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고, ④ 의결이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위헌이다. 


● 1954년 | 입헌주의 유린한 ‘사사오입’ 

1954년 원내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을 골자로 국회에 제2차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같은 해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2/3가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원래 재적의원 203명의 2/3는 135.33…명으로 정족수의 경우 이 숫자보다 많아야 하므로 올림한 숫자인 136명이 맞았다. 그러나 자유당은 사사오입, 즉 반올림을 하는 것이 맞다며 정족수를 135명으로 하여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했다.


● 1960년 | 3·15 부정선거 규탄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여든 중반으로 고령이었고, 따라서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부통령 후보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집권당인 자유당이 내세운 후보 이기붕은 자신의 아들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낼 정도였지만, 인품과 능력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다. 자유당 독재정권이 이기붕 당선을 위해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자, 마산의 고등학생들이 선거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한 달 후 마산 앞바다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혀 숨진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떠오르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1960년 | 4·19혁명 ‘민주주의여 만세’ 

4·19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시발점이다.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떠오른 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던 중 폭력배들의 습격으로 2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서울의 모든 대학과 고등학교는 4월 19일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 최초의 시민혁명 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 1961년 | 5·16 군사쿠데타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일년도 채 안 돼 무너졌다. 정치 군인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고, 이후 1979년 10·26 사건으로 죽을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장기집권, 독재정치를 했다.


● 1972년 | 10월 유신 단행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독재 통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간신히 이겼다.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이로써 국민이 직접 투표하는 대통령 선거가 사라졌으며,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어용단체가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았다. 그리고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임명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뿌리째 뽑혔다. 언론을 통제하고, 양심적인 판사를 무더기로 해임하고 협박했으며, 신문기사를 검열하고,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권에 반대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되지 않았다. 유신 독재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저항이 점차 거세지자 정권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맞섰고, 이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밤 암살된다. 이로써 18년간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87호(2024.06)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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