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가 영 ‘스스러웠던’ 사내는 아랫방과 윗방으로 나눠 쓰고 사는
자기들 부부의 삶도 이해 못하는,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다.
앙상한 몰골로 은폐된 방을 나와 비척거리며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사내의
한 번만 더 날아보자는 외침이 슬프게 가슴에 전해진다.
은폐된, 무력한, 슬픈 자아
사내(주인공 ‘나’)가 사는 곳은 ‘유곽(창녀를 두고 매음을 하는 집)’ 같은 곳이다.
아내와 방을 둘로 나눠 쓰고 사는 이 사내는 지식인으로, 직업이 없다.
어둡고 좁은 반쪽짜리 자기 방의 이부자리 속에 스스로를 은폐시킨 채 살고 있다.
몸도 약하고, 삶에 의지가 없어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사내는 아내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를 만큼 현실감각이 없다.
지식인이며 성인인 어른이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싶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사내는 모든 것이 이렇게 스스럽다. 인간사회가, 인간의 생활이 익숙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나와 아내, 절름발이 관계
사내는 매음을 하는 아내에게 의존해 살아간다.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던 사내는
어느 날 아내에게 그 돈을 도로 줘버린다. 그랬더니 아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방에 사내를 재워준다.
부부인데 돈으로 소통하는 관계가 돼버린 셈이다.
돈을 매개로 아내를 찾는 손님과 아내의 관계나, ‘나’와 아내의 관계나 하등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사내와 아내의 갈등에도 클라이맥스는 있다. 사내는 아내가 종종 자신에게 건넨 알약이 아스피린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약이 사실은 수면제인 아달린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내는 매음을 위해 이 알약으로 옆방의 남편을 재웠던 것이다.
사내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와 아내의 관계가 절름발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나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사내는 인간사회와도, 아내와도 절름발이 관계로만 존재한다.
조국이 깡그리 말살돼가는 시대에 문학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해설할 때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표현상의 특징을 짚는 것이다.
인간의 잠재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표현하려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다는 게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무의식의 세계가 자유롭게 발산되도록 하는 상태에서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자동기술법을 쓰고 있다고.
쉽게 말하면 심리주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럴까? 소설은 인과적인 맥락이 별로 없고, 시공간에 대한 소설적 장치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인공 사내의 자의식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
1936년 <조광>에 발표된 이 작품을 두고, ‘나’를 통해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내면과 무기력한 삶을 형상화한다고 해설한다.
물론 이 소설을 그저 삶을 유폐시킨 한 사내에 대한 얘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아예 시대적 배경과 무관할 수는 없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46호(2021.01)에 실린 글입니다.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