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투병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따금 환자들은 수치와 죄책감을 마주한다.
하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면,
수치와 죄책감을 넘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온다.
병에 걸린 다음 밀려오는 수치심
정음이는 중학교에 진학하며 흐뭇한 체질 변화를 겪는다.
맨날 야식을 먹어도 살이 죽죽 빠져서 먹어도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부러운 아이로 전교에 소문이 났다.
그런데 체중이 갑자기 너무 많이 줄어서일까? 계단을 조금만 올라도 숨이 가빠오고 조그마한 일에도 벌컥 짜증이 난다.
무엇보다 눈알이 점점 튀어나온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병원을 찾은 정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는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인 ‘그레이브스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온몸이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질환의 여파로 물들어 가게 된다니…. 어린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병에 걸린 정음이의 마음은 어떨까?
갑자기 찾아든 병 때문에 여느 또래와 같은 일상을 포기해야 하고, 그동안 세워놨던 미래 계획도 전부 수정해야 할 테다.
내 삶이 나의 인생이 아니라 병의 일대기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게다가 스테로이드 치료를 시작하며 ‘병 걸려서 갑자기 뚱뚱해진 아이’로 유명해진 정음은 수치를 느낀다.
수치는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는 아주 강력한 감정이다. 특히 청소년기 때는 더하다. 학교에만 가면 왜 그리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 자주 생기는지.
교실에서 하루 종일 친구들과 붙어있다 보니 신경 쓰이는 일이 많이 생겨서일까?
사실 청소년기에 유독 수치심을 잘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감정은 크게 일차정서와 이차정서로 나뉜다.
일차정서는 인간이 영아 시기부터 표현하는 기쁨, 슬픔, 놀라움, 화남 등 즉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다.
반면 이차정서는 돌 이후에나 나타나 서서히 발달하는 감정인데,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타인의 상황을 살피는 능력을 갖춰야 느낄 수 있다.
수치, 죄책감, 질투, 자긍심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투병은 정말로 지독한 일이다. 환자는 아픈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병에 걸린 스스로가 수치스러운 순간도 마주하고,
때로는 병에 걸린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까 걱정해야 한다.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수치와 죄책감은 타인의 상황을 살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자기 행동과 세상을 돌아보고 더욱 높은 수준의 도덕적 행동과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정음은 병을 앓으며 또래에 비해 수치심, 죄책감과 유달리 많이 조우했다. 하지만 그래서 누군가의 조그마한 아픔에도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게 되었다.
정음은 방사성 치료를 받은 후 자기 주변을 지나치는 만물을 걱정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 길에 핀 꽃들까지도.
아픈 정음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혹시라도 세상의 온갖 생물이 아플까 살피는 모습이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