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읽는 행위는 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작의 행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여러분은 책을 읽을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탄탄한 플롯?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무쌍한 전개?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한 인물들과 대사?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의 주제?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각자 좋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 중 하나이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떤 얘기든 그것이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라고 느껴지면 그 글을 좋아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솔직함은 많은 경우, 용기를 수반하는 일이지요. 어떤 책들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생각의 과감함과 고유함 때문에, 읽고 나면 표지만 봐도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나아가 어떤 책들은 그것이 내포한 세계의 급진성과 사람들에게 끼친, 혹은 끼쳐 온 영향 때문에 ‘위험하다’라는 인상을 풍길 때도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이 저에겐 그런 책들 중 하나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은 뇌 손상을 가진 아들의 아버지가 된, 갓 태어난 아이의 죽음을 원하는 ‘버드’라는 청년의 심리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버드는 27세의 영어 학원 강사입니다. 그에게는 오랜 꿈이 있죠. 바로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일입니다. 그는 늘 아프리카 지도를 사 모으면서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죠. 하지만 그는 결혼을 했고 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상황이기 때문에, 변변치 않은 그의 강사 월급으로는 아프리카 여행은 사실상 힘든 일입니다.
서점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사서 돌아온 날, 아내가 출산한 병원으로부터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병원에서 갓 태어난 버드의 아들이 ‘뇌 헤르니아’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버드는 제일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뇌 헤르니아의 갓난아기가 정상적으로 자랄 희망이 있는 건가요?”
병원 원장의 답은 이렇습니다. 두개골을 잘라내고 빠져나온 뇌를 밀어넣는다고 해도 식물인간이라도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병원에 있는 버드와 장모님은 아이가 금세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아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아기가 죽으면 산모가 충격을 받을 테니 지금의 상태는 이야기하지 말고 대충 둘러대기로 말을 맞춥니다.
하지만 뇌 전문 병원으로 옮겨온 아기는 생각보다 건강했어요. 며칠이 지난 뒤에도 버드의 바람과는 달리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혹이 튀어나온 채로 아기는 요람에서 열심히 울어대고 있었죠. 그런 아기를 보며 버드는 생각합니다.
… 그리고 별안간 버드는 자신이 일종의 수치스런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실로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것은 버드가 소아과의 창구에서 아기의 생존을 알았을 때 끔찍하게도 시커먼 멸구 떼처럼 그의 머릿속 암흑에 나타나 엄청난 기세로 증식하면서 그 자체의 의미를 점차 명확하게 만들어 온 열망이었다. 나와 아내에게 그 식물적 존재, 아기 괴물이 한평생 들러붙어 살아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 새삼 버드는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기 괴물로부터 도망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아아, 나의 아프리카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순간부터 버드는,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열함으로 가는 내리막길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는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고 싶다는 시커먼 욕망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버드는 자신의 파렴치함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솔직해지지 못한 채 의사 앞에서 머뭇거리기 시작합니다. 보다 못한 담당 의사가 그에게 먼저 제의합니다. “원하신다면 분유 대신 설탕물을 줄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 아기를 쇠약하게 만들어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죽게 하겠다는 이야기지요. 버드는 수치심에 벌벌 떨면서 의사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
버드는 맨 처음 아기의 상태에 대해서 들었을 때 부터, 점점 자기 자신 안으로 침잠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드에게 있어 아이의 이상은 그것을 둘러싸고 타인과 이야기를 하긴 커녕 혼자서 다시 생각해 보려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수치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이었다.
이 소설의 구절이 말해주듯, 버드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입니다. ‘괴물 아기’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이 생길지만이 그의 관심사입니다. 정작 아이를 낳은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속만 태우고 있는 와중에, 그는 대학 시절 여자친구 히미코를 찾아갑니다. 남편의 자살 후 일종의 성적 모험 상태에 빠져 있던 그녀는 버드에게 도피처가 되어줍니다. 의미와 책임이 존재하는, 그의 아기가 살아 숨쉬는 현실에서 허무와 쾌락의 세계로 도피한 것이죠. 처음에는 단순한 쾌락 추구에 불과했던 둘의 관계는 점점 깊어져서, 나중에는 설탕물만 받아먹고 있는 아기가 죽고 나면 함께 아프리카에 갈 계획까지 세우게 됩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담긴 세상
소설을 읽는 내내 저는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1994년 스웨덴 한림원은 ‘오에는 시적 언어로 현실과 신화가 혼재된 세계를 창조하고, 곤경에 처한 현대인의 모습을 담아 당혹스러운 그림을 완성했다.’ 라는 말과 함께 오에 겐자부로에게 노벨상을 수여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의 세계는 시종일관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워요. 병원 의사들은 쿡쿡거리며 버드를 비웃고, 장인과 장모는 이상할 정도로 아이, 그리고 버드와 감정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순간 순간 현실은 캐리커처처럼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기분 나쁜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작가가 세상을 묘사하는 방식 역시 비슷합니다. “죽은 거인의 체온처럼” 초여름의 훈김이 걷히고, 아기를 위한 요람은 “거대한 곤충망”이 됩니다. 친구의 얼굴은 “초조감의 곰팡이”로 덮여 있고 귀뚜라미는 “토하듯이” 노래합니다. 이렇듯 어딘가 비틀어진 세계는 읽는 이로 하여금 버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의 당혹감과 절망감이 세계에 투사되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이 책이 ‘출구 없는 현실에 놓인 현대인에게 재생의 희망은 있는지 물음을 던진다’ 고 평가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 책에 대단한 사회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개인적인 체험》은 사실 읽는 사람에 따라 엄청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책이에요. 버드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온통 난잡하고 추악한 생각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묘사되었기 때문인데요, 저는 오히려 그 투명함에 어떤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격렬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롤러코스터처럼 상승과 추락을 반복하는 버드의 내면 속에 인간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저는 그런 종류의 진실을 담는 것이 문학의 아주 중요한 역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E’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90호(2024.09)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