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질문을 해본 적 있는가?
‘왜 거리의 노숙인은 일하지 않을까?’
‘왜 구걸한 돈으로 밥을 먹는 대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까?’
‘왜 편의점 직원과 택시기사는 불친절할까?’
‘왜 설거지나 청소를 더 깨끗이 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그만큼 그들의 삶을 궁금해 해본 적 있는가?
이야기라도 나눠 봤는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만한 이유는 없었을까?
"아름다움이란 돈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고, 일자리는 아름다워야 얻을 수 있는데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러니 노력할 이유가 있겠는가."
가난은 노력하지 않은 것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틀린 얘기다.
노력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또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가난하지 않은 것뿐인가? 심지어 아무 노력도 없이 떼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단지 삼성전자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2019년 한 해 동안 삼성전자에서만 3538억 원을 배당받았다.
요즘 건물주를 ‘갓물주’라고 부르는 이유도, 일단 건물주가 되면 별다른 노력 없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건 똑같은데 부자들에겐 아무 말도 안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비난하는 사회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똑같이 노력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분명 가난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하면서
노력해서 부자가 된 사람은 무조건 칭송하는 사회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낙인이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너무 어려워지자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나무는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노력해도 안 될 거라 느끼는 사람들은 미래의 큰 행복을 위해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탐닉하게 된 것이다. 이런 소확행의 추구는, 저자의 말마따나
"확실히 패배주의적이긴 하지만 안전하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가슴 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빈곤하거나 가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염치없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느끼는 불평등과 저자가 이야기하는 불평등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비슷할 것이다. 이제 책을 통해서 무례하고 지저분한, 우아하지 않은 가난의 모습을 직면하자.
어차피 가난을 상상할 거라면, 정말 제대로 상상해 보자.
※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40호(2020.07)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