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안희철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난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숱한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장면에서, 오펜하이머가 읊조린 독백이다. 인류 과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오펜하이머.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스스로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자조한 걸까. 그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1900년부터 1945년에 걸쳐 발전한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등의 물리학을 현대물리학이라고 부른다. 뉴턴역학으로 대변되는 고전물리학에서 미시세계와 확률적 세계를 그리는 양자역학으로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이 시대는 그야말로 물리학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기의 시대와도 맞물려 있었고, 당대 뛰어난 물리학자들은 인류의 광기를 막기 위해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수행한다.
이들의 노력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영화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라는 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면서 과학자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 나아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원자폭탄 개발이 어떻게 진행됐고, 이로 인해 인류가 맞이한 파멸을 잘 그려냈다.
초거대 규모의 맨해튼 프로젝트,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는 핵개발 프로젝트인 ‘우라늄 클럽’을 만들어 핵개발을 연구했다. 핵개발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핵무기 개발이 가능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적국인 독일과 맞서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영국, 캐나다 등 연합국들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려고 계획한 프로젝트가 맨해튼 프로젝트다. <오펜하이머>는 얕은 상식으로 이름만 들어본 맨해튼 프로젝트의 실체를 일반 대중에게 현장감 있게 보여준다. 총 예산만 약 20억 달러(2024년 물가 기준 원화로 대략 40조)였고, 관여한 인원이 약 13만 명에 이른다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슈퍼스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을 비롯해서, 오펜하이머, 리처드 파인만, 에드워드 밀스 퍼셀,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에드워드 텔러, 볼프강 파울리 등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소한 아이러니는,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한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를 21명이나 배출했는데, 이들을 이끌고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오펜하이머는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었다!
한편 일반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를 오펜하이머라고 알고 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는 군사 프로젝트라서 오펜하이머가 아닌, 미국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가 총 책임자였다. 그는 과학자 그룹의 리더인 오펜하이머와 함께 원자폭탄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원자폭탄의 최초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진행되었고 이를 ‘트리니티 실험’이라 부른다. 트리니티 실험 이후 포신형 원자폭탄과 내폭형 원자폭탄, 이렇게 두 종류의 원자폭탄이 만들어졌는데, 포신형(농축 우라늄 235를 이용한 총신형)에는 ‘리틀 보이’라는 이름이, 내폭형(플루토늄 239를 이용한 내파 방식의 핵분열)에는 ‘팻 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 국방부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는 리틀 보이를,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는 팻 맨이 투하되었다. 일본은 곧바로 투항했고, 2차 대전이 종료되었다. 핵폭탄 투하로 전쟁은 종식됐지만, 과연 세상에는, 인류에게는 평화가 찾아왔을까? 또 다른 종류의 파멸이 만들어진 건 아닐까?
복합적 시선, 세 개의 시간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전개의 시간대를 셋으로 나눠 전개하면서 앞에서 한 질문의 답을 찾아나간다. 첫 번째 시간대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이고, 두 번째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 비밀 청문회를 보여주는 과정이고(컬러 화면으로 오펜하이머의 시선에서 펼쳐진다), 마지막은 원자력 위원회 창립위원 루이스 스트로스의 공개 인사청문회 모습이다(흑백 화면으로, 스트로스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이렇게 복합적인 시간대 덕분에 관객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맨하튼 프로젝트를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 오펜하이머의 내재적 갈등과 고통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게 해준다. 러닝타임이 대략 세 시간 가량인데다 조금은 복잡한 구성이라 이해가 어렵다거나 지루하다는 평도 있지만, 반대로 오히려 지루하지 않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몰입했다는 사람도 많다. 어쨌든 세 가지 시간대를 복합적인 시점에서 다룬 까닭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라는 내적 고뇌와 갈등까지 잘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이 많다. 영화는 단언컨대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골든글로브에서 감독상을 비롯, 5개의 상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비롯 7개의 상을 수상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로 인류에게 과학기술의 발전을 선물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에게 고통과 절망, 불행을 함께 안겨 준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난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한 것이리라.
2차 대전 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고통받으며 극한의 어려움에 처한다. 영화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 비밀 청문회에서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과거를 부정당하는 오펜하이머를 그려보인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89호(2024.08)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는 불법이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